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단 편집) === 항쟁의 확산 === [[파일:5.18 광주항쟁의 확산.jpg|width=600]] {{{#!folding ※ 전남 지역별 항쟁 형태 : 보기 / 접기 ||<-12> ''전남 지역별 항쟁 형태''[* 「외곽 지역의 항쟁으로 본 5.18민중항쟁」, 오유석, <5.18 민중항쟁과 정치,역사,사회> 제3권, 5.18 기념재단, p309] || || 항쟁 형태 || 화순 || 나주 || 함평 || 무안 || 목포 || 영암 || 해남 || 진도/완도 || 강진 || 보성/장흥 || 여수/순천 || || 차량 시위대 진출 || O || O || O || O || O || O || O || O || O || △ || X || || 지역 시위대 구성 || O || O || O || O || O || O || O || || O || || || || 무기 획득 || O || O || O || O || O || O || O || O || O || || || || 이념/구호 || O || O || O || || O || O || O || || O || || || || 유인물 배포 || || || O || || O || O || || || || || || || 저지선 충돌 || O || O || O || || △ || O || O || || △ || || ||}}} 5월 21일의 집단발포 이후부터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광주의 시위대가 시외로 빠져나가면서 항쟁은 [[전라남도|전남]]으로 파급되었다. 사실 광주에서 발생하고 있던 일들은 조금씩 밖으로 알려지고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집단발포 이후 흥분한 시위대가 차량을 몰고 다니며 사실을 알리자 주민들도 분노하여 시위에 호응했다. 그러면서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 각 지역에서도 지역민들에 의한 시위와 집회가 발생하였다. 지역 주민들은 광주에서 온 시위대가 무기를 탈취하는 것을 돕거나 음식물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시위대와 함께 광주로 들어가 항쟁에 직접 참여하는 이도 있었다. [[화순군|화순]]은 광주와 가까웠기에 5월 18일부터 소식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화순 주민들도 광주에서 벌어지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었다. 5월 21일 집단발포 이후 광주로부터 차량시위대가 도착하여 사실을 알리자, [[화순군청]]과 화순경찰서 앞 사거리에 화순군민 2000여 명이 집결했다. 주민들은 인근에 있던 화순시외버스터미널과 주변 시장에서 [[김밥]] 등을 구해 시위대에게 제공했다. 청년들은 시위대에 호응하여 화순경찰서, 화순광업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는 사이 일부 지역에서는 시민군에게 무기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예비군을 소집, 총기를 미리 나누어주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전사고 위험성을 이유로 다시금 무기를 회수하는데, 여기에 반발하는 청년들은 회수된 무기는 물론이고 경찰이 숨겨둔 무기까지 찾아내 시위대에게 제공하였다. 화순에서의 시위는 [[너릿재]]가 봉쇄되는 22일 오후까지 이어졌다. [[나주시|나주]]에서는 오후 2시 경 나주삼거리와 나주버스터미널에 차량시위대가 몰려와 계엄군의 발포 소식을 전하고 무기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러자 500여 명의 청년과 군민들이 파출소와 무기고 위치를 가르쳐주며 무기 탈취를 지원했다. 마침 대부분의 경찰이 광주의 시위를 막기 위해 차출된터라 일행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몇몇 행정기관들은 자체적으로 무기를 은닉하며 무기 탈취를 막으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대와 나주군민들은 무기를 성공적으로 가져갔다. 이후 몇몇은 타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나주에 남아서 시위를 계속 했다. 군민들은 시위대에 동참하거나 음식을 제공하며 도왔고, 시위대는 '남고문 광장'에서 경계근무를 섰다. 나주에서의 시위는 23일까지 계속 되었고 그 이후에는 잠잠해졌다.[* 한 가지 불운한 일은 차량시위대의 이동 도중 나주군청 앞 도로에서 임동규(52) 씨가 차량에 치어 사망한 것이다.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안전함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하러가다가 변을 당했다.] [[함평군|함평]]은 1970년대 [[함평 고구마 사건]]의 여파로 [[가톨릭농민회]]의 입지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광주로부터 시위대가 오자 군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청년들은 시위대 차량에 올라타고 시위에 동참하는 경향을 보였고, 음식과 음료수를 시위대에 제공하였다. 지역주민 60~70명이 신광파출소에 몰려가 반정부 구호를 외쳤으며, 일부 주민들은 22일의 궐기대회[*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궐기대회는 "함평은 함평 주민이 지키자"는 내용이어서 친정부도 반정부도 아닌 애매한 위치였다고 한다.]에 대한 반발로 시위에 동조하기도 했다. 함평군에서의 시위는 학교면, 신광면, 대동면 등지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항쟁의 영향은 3일 정도 이어지다가 지자체의 능동적인 대응으로 사그라들었다. [[영암군|영암]]에서는 5월 21일 아침에 시위 동참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왔다가 돌아갔었는데, 오후가 되어 공수부대의 집단발포 소식을 들은 시위대가 다시 돌아왔다. 시위대는 군민들의 지원 하에 영암경찰서를 습격했으며, 인근 지역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영암군민들도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영암전자과학고등학교|신북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영암 청년 100여 명이 버스 2대에 올라타 광주로 출발했고, 영암읍 6개 단체 회장들은 시위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모금을 하여 광목을 사다가 반정부 구호를 적어보냈다. 23일부터는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무기 회수 작업과 자체 방어가 이루어졌고[* 무기를 탈취하는 것을 돕고, 나중에 그 무기를 회수하는 것을 도운 세력은 영암 지역의 시위대를 주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5.18 직후 치안유지 공로로 상장을 수여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초기에 시위대를 도왔다며 구속당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시위는 잠잠해졌지만 시외도로에서는 시위 차량이 간간이 지나가곤 했다. [[강진군|강진]]에서는 오후 4시 경 3대의 버스에 분승한 시위대가 몰려와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다. 그러자 군민들이 시위대를 격려하며 환호했다. 특히 청년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 시위대는 강진읍 교회에 본부를 두고 조직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전남생명과학고등학교|강진농업고등학교]] 학생들도 나서서 5월 23일 400~500명이 [[교복]]을 거꾸로 입은 채로 '계엄철폐', '민주회복',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행진하였다. 강진의 시위는 질서 있게 이루어져 딱히 체포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이 24일 경 잠잠해졌다. [[목포시|목포]]에서는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로 오랫동안 시위가 벌어졌다. 5월 21일 오후 2시 15분 경 시위대 200여 명이 여러 대의 차량을 탄 채로 목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연신 구호를 외쳤고,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목포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했고, 동시에 광주 다음으로 시민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래서 목포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하여 시위대를 형성했다. 몇몇 경찰들이 시위대를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동안 목포 지역 기독교청년회와 앰네스티 소속원들은 [[KBS목포]]에 들어가 대민 방송을 시도했고, 특히 목포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 안철(34)[* 안철(安哲, 1946~2003)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약사]]로 일해왔다. 그는 5.18 당시 목포 지역의 항쟁을 이끌었으며 그런 활동으로 인해 주모자로 몰려 1980년 7월 28일 연행되었다. 상무대에서 8년 형을 선고 받고 광주 교도소에서 복역 중 9월 9일부터 9월 30일까지 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1년형을 살고 출감하였다. 이후 [[신한민주당]] 목포지구위원장과 '한국기독청년연합' 초대 회장을 역임하다가 병세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2003년 뇌경색으로 별세하여 국립 5.18 민주묘지에 묻혔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9366|#]][[http://518.mpva.go.kr/518c/info/buryManView.do?site_idx=6&nm=%EC%95%88%EC%B2%A0&affilication=&birthplace=&search_m_s_number=&man_class=&deathday_start_yy=1900&deathday_start_mm=1&deathday_end_yy=2018&deathday_end_mm=4&bury_place=006&bury_start_yy=1900&bury_start_mm=1&bury_end_yy=2018&bury_end_mm=4&bury_end_dd=&bury_area_num=&bury_gubun=&admin_search_type=&admin_search_str=&isReqPicture=N&m_s_number=206386|#]]]의 주도 하에 시위대를 이끌었다. 21일 저녁부터는 시위는 점차 과격해져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을 파괴했다. 22일부터는 안철을 중심으로 '시민민주투쟁위원회'가 설립되어 궐기대회를 열었다. 5차례에 걸쳐서 열린 궐기대회는 목포역 광장에서 열렸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여기에 참석했다. 23일에는 밤 8시부터 2시간 40분 동안 10만여 명이 참석하여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와 집회는 27일까지 이어졌으며 무기를 회수한 상태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서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37|당시 목포에]]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103|뿌려졌던 유인물]] [[해남군|해남]]에서도 차량시위대가 도착했는데 차량에 동승한 여고생이 태극기를 들고 군민의 지원을 호소하자 수많은 주민들이 몰려왔다. 오후 3시부터 타지역 시위대와 지역민 3000여 명이 해남군청 앞 군민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행진을 벌였다. 해남의 교회들도 시위대를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고 주민들도 음료수, 스프레이 등을 제공했으며, [[대흥사]]와 몇몇 여관은 숙식을 마련해주었다. 오후 5시에는 더 많은 수의 차량시위대가 도착하여 군민들과 함께 해남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관공서는 주민들에 의한 자체 경비가 이뤄졌다. 오후 6시 30분에는 지역 내에 있던 31사단 99연대 2대대 주둔지로 찾아가 시위를 벌였으나 대대장과 시위대 대표 간의 협상으로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해남에서의 시위는 근처의 [[완도군]]와 [[진도군]]으로 이어져 시위와 시가행진이 이뤄졌다. 시위는 23일부터 계엄군이 우슬재를 점령하고 군중과 차량들에게 발포를 자행하면서 멈췄다. [[장흥군]]에서는 22일 오전에 시위대가 나타나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일부 군민들이 시위에 동참했고, 23일에는 100여 명의 시위대가 장동면지서를 공격했고, 200여 명은 보성과 순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장흥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400여 명의 시위대는 이동하는 다른 시위대열을 반겨주었고, 관산면에서도 군중들이 합류하였다. [[보성군|보성]]에서는 21일 저녁 8시에 시위대가 나타나 시위를 하다가 [[벌교]] 방면으로 이동했다. 23일에는 [[화순군|화순]]과의 경계가 있는 문덕면에서 시위대가 무기를 탈취하여 군과 경찰과의 충돌이 임박한 듯 했으나 시위대의 무기 반납과 자수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무안군|무안]]에서는 시위대가 들어왔을 때 지역주민들이 호응하며 시위와 무기 탈취가 이루어졌고,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시위대 차량이 오고가며 항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위대 차량이 전부 떠나고 나서는 더 이상의 자체적인 항쟁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광군|영광]]에도 시위대가 다녀가기는 했지만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담양군|담양]]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담양경찰서가 공격당해 무기가 탈취되는 일이 발생했고, [[순천시|순천]]과 [[여수시|여수]]에서는 시위대가 오지는 않았지만 휴교령이 떨어지고 비상이 걸리는 등의 소동을 겪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